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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 현대그룹 왕회장 정주영

by 롤모델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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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으로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현대그룹이라는 거대한 회사의 초대 회장이다. 우리나라에서 1세대 기업인으로는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삶 일부를 담아 봅니다.

아산 정주영
출처: 아산 정주영 홈페이지

 

 

프로필

현대그룹 왕회장은 1915년 오늘날 북한에 위치한 아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여덟 자녀 중 장남으로 집안에서 많은 책임을 맡았다. 

출생

사망
1915년 11월 1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2001년 3월 21일(향년 85세)
형제자매 남동생 정인영, 정순영, 정세영, 정신영, 정상영
여동생 정희영
본관 하동 정씨 배우자  변중석
본관 하동 정씨 자녀 장남 정몽필, 차남 정몽구
삼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사남 정몽우, 오남 정몽헌
육남 정몽준, 칠남 정몽윤
팔남 정몽일
차녀 정정인
삼녀 정정임
종교 부종교 -> 개신교
학력 송전공립 보통학교(졸업) 별명 왕회장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경력 2006년 11월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그는 두 번의 가출로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짓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주영은 다시 세 번째 가출을 하면서 소 한 마리를 팔았던 돈을 훔쳐서 가지고 나갔다 그 당시 소 한 마리를 팔았던 가격은 70원이었다. 당시 정주영은 소 한 마리를 팔았던 죄책감에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북한으로 소를 보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소 한 마리의 대한 아련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1998년 통일소를 북한으로 1001 마리 보냄

그는 몇 년 동안 다양한 직업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1938년까지 그는 쌀가게를 차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현금을 모았습니다. 쌀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서 그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다. 쌀집 주인아주머니는 정주영의 첫 이미지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해 꽤 힘을 쓸 것 같았고 하회탈같이 웃는 모습이 순진해 보였다는 것이다.

 

또 그는 힘이 장사였으며,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남들 잘 때 혼자 일어나 일할 준비를 다했다고 한다. 당시 쌀집 종업원이 7명 정도였는데 제일 막내 정주영이 주인공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은 바로 정주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주영 쌀가게 일하던 시절
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기업가 정신

정주영은 어렸을 때부터 도전정신이 매우 강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업가 정신을 일찍이 보여주는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전통적인 농경 사회를 탈피하고 두 번의 가출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집안의 장남으로 그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쌀가게를 운영하다가 청년 시절에 자동차 수리 사업을 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가혹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직후,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 사업에 다시 뛰어들었고, 그 당시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80명가량이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설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이 사업들을 현대라는 뜻의 현대라고 회사명을 지었다.

 

 

현대차를 세계시장에 알린 포니Pony 이야기!

오늘날 현대그룹을 이야기하면 건설, 조선,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국산차 최초의 포니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국산차 최초의 자동차 포니는 후륜구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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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초 서울에서 사업할때 정주영
1940년 초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 (가운데 정주영)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서울을 기반으로 둔 자동차 수리 회사와 건설 회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6.25 당시 정주영은 부산으로 피신했다. 부산에서 미군들에게 주택을 제공할 기회가 생겼고, 정주영은 계약자로 다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미군 대통령의 방한이 있을 때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를 입히는 일을 자주 받았는데, 겨울에 녹색 잔디를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다른 업체 모두 거절했지만 정주영은 오더를 받아들였다. 녹색으로만 덮으면 된다는 말에 트럭 30여 대를 동원하여 보리밭에 가서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심은 자리에 다시 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발주를 받았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후 정주영은 평판이 좋은 건설회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주로 미국인과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현대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의 기반 시설을 복구하며 고군분투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주요 프로젝트 사업은 한강을 연결하는 다리 재건사업이었다. 

 

6.25 전쟁으로 파괴된 다리를 다시 재건하는 그 당시 사업으로는 매우 큰 사업이었다. 정주영은 한강다리 프로젝트를 완수하며 강력한 찬사를 받게 되면서, 현대건설의 위상이 더욱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한국 정부에서도 매우 든든한 건설회사로 인정을 받았다. 

1955년 고령교 복구공사
1955년 고령교 복구공사

고령교 공사는 처음 계획보다 엄청난 손실을 본 공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고령교 공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현대건설이 발돋움하는데 발판이 된 것이다.  고령교 공사의 경험으로 정부에서 복구공사를 수주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 중공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조선, 자동차 제조 등 핵 분야에 진출하며 현대를 다각화를 했다. 자동차, 건설, 철강까지 지속적인 성장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현대자동차는 아시아와 중동 전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현대그룹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다. 

 

조선소의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이다. 1971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이에 불가능하다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라고 지시했다.

 

조선소를 짓기 위해 영국의 바클리스 은행에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거절당했다. 바클리스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회사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그의 추천서가 있으면 은행에서 투자유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300만 차관 획득한 정주영
출처:아산 홈페이지

 

정주영은 롱바텀 회장을 찾아가서 그 당시 500원 지폐에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 그렇게 설득을 하여 추천서를 받았다. 추천서를 들고 은행에 갔지만 은행에서 다시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찾아오라"라고 말한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
출처:아산 홈페이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처남이 값싼 배를 구한다고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26만 톤 선박 수주를 따냈다. 조선소도 없는데 누가 발주를 할 수 있을까? 정주영은 배를 만들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조선소도 없는 회사에 발주를 한 사람이나 그 계약을 따낸 정주영이나 도박 게임이 아닌가 말이다. 이후 한국 정부의 보증을 서주면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그렇게 울산에서 조선소를 착공하게 된다.

1972년 울산 조선소 착공
1972년 울산조선소 공사현장

더 놀라운 일은 울산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도크가 부분 완공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깔고 배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배와 독을 동시에 만든 것이다. 정주영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렇게 생각이나 했을까 그 당시에.

 

그렇게 2년이 지난 뒤에 발주한 첫 번째 발주인에게 인도하게 된다. 첫 번째 인도 후 10년이 지난 시점 현대 조선소는 세계적인 조선 시장에서 선두자리를 꾀차고 있었다. 이를 통해 현대는 중공업 분야 확장을 하고 궁극적으로 현대 중공업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건조된 1호 선박 인도
1974년 첫번째 완공한 선박 인도

 

1세대 대표기업의 승승장구는 한국경제 성장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때 나온 이야기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대는 정주영의 리더십 아래 서울~부산 경부고속도로, 소양 다목적댐 등 국내 주요 산업 인프라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국내 기술을 기반으로 최초의 한국 자동차를 생산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고속도로 개통식 테이프 커팅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정주영은 "실패는 없고 시련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정주영에게는 시련만 있었지. 그가 마음먹고 생각하는 일은 시련은 있었으나 실패 없는 사업가의 사업가가 아닌가 말이다. 오늘날까지 정주영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창업자이자 국가 경제 발전에 가장 큰 공헌자로 여겨지고 있다. 

 

 

국가건설 및 자선활동의 세 가지 노력

첫째

서해안 간척 프로젝트 - 1980년대 정주영은 농업산업을 돕기 위해 충남 서산에서 대규모 토지 개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서해안 간척 사업은 "정주영 공법"으로 유명하다. 방조제 막바지 공사 중 거센 물살로 인한 공사에 난항을 겪었다. 정주영 회장은 울산 조선소에 정박해 있던 폐유조선을 서산으로 옮긴 뒤 이를 침몰시켜 물을 막은 창의적 발상으로 그것을 실현하는 데 성공한다.

 

서산 방조제 공사를 통하여 1억 5,537㎡(약 4,700만 평)의 바다가 대규모 농지로 변화하였다.

폐유조선
폐유조선으로 물을 막는 장면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정주영 회장
1982년 현장을 진두지휘 하는 모습

둘째

아산병원/아산재단의 이름은 정주영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아산 병원은 1977년 아산재단 설립과 함께 과감하게 추진했던 의료사업이었다. 가장 심각한 의료 취약 지역에 우수한 의료진과 현대 시설을 갖춘 종합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한 일이지만 "의료 취약지역에 병원을 세운 것은 의료 신기술을 이용해 농촌 환자를 치유하는 데서 나아가 노동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결국 노동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함"이라 한다.

1978년 정읍. 보성, 1979년 보령, 1979년 영덕, 1989년 서울, 1989년 금강, 1989년 홍천, 1996년 강릉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셋째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주영은 일본과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IOC에게 한국이 국제 스포츠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광범위한 해외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확신시켰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경제 발전은 날개를 단 듯 세계로 뻗어나가는 아주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서울 올림픽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과 동기부여가 되었다.

88올림픽 개막식
88서울올림픽 개막식 당시의 모습
사마란치 올림픽 위원장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정주영회장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중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 활동중인 정주영회장

 

1부 마무리

정주영 회장의 아버지 말씀을 그대로 따랐으면 지금의 현대그룹은 없었겠지만, 뼛속까지 도전정신과 창의적 생각으로 농사일로 뭔가를 해도 했다고 보입니다.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으로 맨땅에서 거대한 그룹을 완성시켜 나가며, 어려운 시국에서도 기업의 발전과 국가발전에도 1등 공신이 아닌가 합니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발전과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기업인으로는 1등 공신이 아닌가 생각해 보며 1부 마무리합니다.

 

정주영 회장의 명언들

 

 

현대차를 세계시장에 알린 포니Pony 이야기!

오늘날 현대그룹을 이야기하면 건설, 조선,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국산차 최초의 포니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국산차 최초의 자동차 포니는 후륜구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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